남수연(성결대학교 교수)

박정근의 사진기는 마이크와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사진기는 우리가 평소 간과하던 곳에 있는 이름 없는 이들을 소환해 그들의 목소리를 듣게 만든다. 음성 꽃동네가 그랬고, 병원 사무직 직원들이 그랬으며, 방글라데시의 아동 벽돌공이 그랬다. 문래동 금속공도, 이집트 염전 노동자도, 그리고 최근의 제주 해녀도 그랬다. 사회의 한켠에서 군중으로 뭉뚱그려 이해되던 사람들이 특히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가며 삶을 마주하는 방식은 박정근의 사진을 통해 빛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와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박정근의 사진에는 사람과 장소가 있고, 삶을 꾸려나가는 노동이 있다. 이들을 기록할 때 박정근은 언제나 정공법을 택한다. 특정한 장소의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어 함께 먹고 자며 시간을 보내 서로에 대한 어색함이 사라질 무렵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박정근은 이러한 자신의 작업방식을 보여주는 일화 한 가지를 전했다. 제주에서 한동안 해녀를 대상으로 물‧숨‧결 시리즈를 작업하던 중, 서울을 들른 길에 지인을 만났다 한다. 그런데 그 지인이 제주에서 해녀작업을 한다는 박정근의 얘기를 듣고는, 이미 그 곳에서 해녀들과 밥해먹고 귤 따가면서 사진작업을 하는 작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전하더란다. 알고 보니 그 작가가 박정근이어서 헛웃음을 웃었다 한다. 실제로 제주 바다에서 작업할 때 박정근의 하루 일과는 해녀 삼촌들이 뭍으로 나올 때 그물을 끌어올려주고 오토바이를 얻어타고 해녀의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함께 먹고 귤밭이나 당근밭 같은 해녀삼촌의 다음 일터로 같이 나가는 것으로 구성된다. 이처럼 서울로 소문이 올라간 그 방식으로 박정근은 현장바닥에서 구르고 소통하며 서로 다른 장소의 다양한 계층을 탐색하고 기록한다. 

현장성과 함께 박정근이 사진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려 할 때 원칙으로 삼는 것은 사회 구조나 계층에 개개인을 매몰시키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을 집단으로 묶어 정체성을 일방적으로 부여해버리는 것이 얼마나 전체주의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따라서 박정근은 다양한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도 또 사람 수만큼 서로 다른 개인적 스토리를 섣불리 분류하고 이름 지어 압축해버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이미지 속에 살려낸다. 제주 해녀는 그냥 제주에서 물질하는 해녀가 아니라, 온평리에 살고, 이름은 송명자이며, 나이는 57세, 전라도로 원정물질도 다니며, 자식과 생업을 위해 매년 개인굿을 올리는 상군 해녀이다. 제주 입도조는 그저 제주에 정착한 청년세대가 아니라 이름은 한용환이고, 한 인터넷 상거래업체를 다니면서 아내와 어린 딸 둘과 제주에서도 더욱 제주다운 삶을 매일 꿈꾸는 42세 남성이다. 박정근은 오늘을 사는 이런 개개인의 스토리와 꿈에 관심을 가진다. 타고 난 모닥불 장작더미를 후우 하고 불었을 때 타들어가던 장작 하나하나에 살아있던 불씨들이 겹겹이 붉은 빛을 화아 하고 내뿜는 것처럼, 한 장소의 사회적 맥락에서 각 개인의 층위가 가진 다양한 디테일을 그려내려 한다. 거대한 사회구조를 구성하고 살아내는 것은 수많은 개인적 맥락이며, 이 맥락을 이해할 때 사회구조적 변화를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탓이다.

개별적 삶과 노동의 현장을 누비는 만큼 박정근 사진의 질감은 ‘거칠거칠하다.’ 큰 세상을 다 잘라먹고 작은 네모로 한정지어 버리는 렌즈를 들여다보며 그 속에 담기는 이미지 조각을 통해 삶을 이해해온 시간이 25년이고 보면, 시각미에 관해서는 어느 방향이건 도가 틀 법도 한데, 그가 추구하는 미학은 “예쁜” 사진과는 거리가 멀다. 잘 알지 못하는 장소와 사람들을 스쳐가며 그럴 듯한 이미지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것에는 관심이 없다. 또 작업 중 우연히 예쁜 사진이 얻어 걸려도 사진 선별과정에서 이들은 좀처럼 채택되지 않는다. 질퍽하고 거친 삶의 굴곡을 미련스러울 정도로 정직하게 응시하며 바닥의 삶을 땀방울, 숨소리와 함께 가공하지 않고 담아낸다. 

그런데, 거친 삶을 담는 사진치고는 세상을 향한 시선의 방향이 너무 예의바르다. 펄떡거리는 삶의 순간을 포착하려면 피사체를 향해 들이치는 앵글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박정근은 자신의 몸을 바닥에 굴리며 비틀지언정 피사체에게 물리적으로 도전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각도로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위한 시간을 거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렇다. 친해졌지만 막상 그 선 앞에서 사진기는 멈추고 만다. 사실 박정근은 때로 이런 자신의 소심함이 사진예술가로서의 걸림돌이라 여기며 가슴에 안고 끙끙댄다. 평론가들로부터 착한 사람이 예술을 할 수 있겠나, 좀 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혹은 사진이 너무 소극적이다 라는 평을 듣기라도 하면 고민은 더 깊어진다. 그가 들이치는 사진을 찍지 ‘못하는’ 이유는 방해가 될까봐 미안해서이다. 딱 소심하고 착한 사람의 대답이다. 이 대답에는 대상 자체가 자신과 같은 인간이기에 존중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특히 생계를 위한 노동의, 그리고 밥숟가락이 오가는 현장의 엄숙함에 대한 존중의 의미도 내포한다. 소설가 김훈은 아들에게 생계에 대한 사나이의 엄숙한 의무를 당부한 적이 있다. 생계의 의무가 엄숙한 이유는, 식구를 먹여 살리는 일이 중요해서도 있지만, 그만큼 힘에 부친 것을 반드시 해야 해서이기도 하리라. 누구에게나 힘겨운 그런 의무를 애써 지켜내고 있는 자리에 불쑥 들이쳐 흐름을 끊어 순간이나마 자신으로 인해 삶의 무게가 더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박정근의 사진이 예의바른 이유이다. 그래서 “예의 차릴 것 다 차리면서 어떻게”...든 거친 질감의 삶을 담아낸다. 덕분에 우리는 예의바른 연민이라는 흔치 않은 시선으로 우리를 지켜봐주는 사진을 갖게 된다.

예의바름과 더불어 박정근 사진을 고유하게 만드는 것은 박정근의 친화력이다. 박정근을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마음 속 빗장을 잊어버리도록 만드는 신기한 재주를 지녔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몇 마디 나누다보면 어느 새 박정근처럼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테니. 딱히 노력한 적도 없이 그저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의 친화력은 나이, 국적,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불턱에서 거리낌없이 가슴을 훌렁훌렁 열어 재끼는 할망해녀도, 인도 자리아 석탄마을의 소년도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박정근을 밀어내지 않고 집으로 들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제주 입도조들도 박정근과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사를 들려준다. ‘물‧숨‧결 – 물숨’을 촬영할 때 물 속 초상화의 촬영방식은 그 정점이었다 할 만하다. 세 명이 조를 이루어 물속에서 수면을 바라보는 해녀 한 명을 다른 해녀 두 명이 양 옆에서 잡아주어 촬영을 진행했다. 이 방식이 놀라운 이유는 집 안팎의 생계와 살림을 모두 꾸려나가는 해녀의 하루가 숨가쁘게 바쁘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하루 물질을 시작하기 전 해녀의 집에서 물옷으로 갈아입는 그 순간 방바닥을 기어 지나가는 거미에 대고 하루 수확을 기원할 만큼 절실하고 간절한 물질 시간을 쪼개 다른 이들이 입수하는 한켠에서 해녀들이 세 명씩 돌아가며 박정근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온평리 해녀삼촌들이 매일 새벽같이 바다로 달려와 고생한다고 박정근을 불쌍히 여겨주신 탓도 물론 크지만, 애초에 박정근이 밉상이었으면 ‘물‧숨‧결 – 물숨’은 나올 수 없는 작업이었다. 

자신의 사진이 예쁘지도, 핫한 사람들을 향하지도, 밝고 환한 것도, 그렇다고 번득이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것도 아닌지라 자신의 작업이 예술판에서 소위 ‘주류’에 편입될 수 없다는 것을 박정근은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사진판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다큐멘터리 사진과 순수 사진 어딘가의 회색으로 위치시키고 있을 정도이니. 하긴 바닥에서 살아내는 삶의 이야기, 그것에 대한 정직한 대면이 해학조차 입히지 않았을 때 언제 주류인 적이 있었던가. 그 비주류의 길을 마다 않고 걷겠다 한다, 박정근은. 다르게는 할 줄 몰라서. 


지리학으로 바라본 박정근의 사진세계

본 작업은 경제사회적 중심부의 견고한 벽에 가로막혀 진입을 포기한 채 주변부를 부유하는 청년세대의 불안함이 이주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청년세대의 전형을 제주 入島祖 에서 찾고 있다. 

제주로 이주 후 정착하여 자손이 제주인이 되도록 하는 첫 조상, 이들을 제주에서는 入島祖 라 부른다. 

제주는 지리학적으로 우리나라의 주변부에 위치할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1105년 탐라국이 고려에 복속된 이후 천 년 가까이 외딴 주변부에 머물러, 주류사회에서 고립되거나 삶의 기반을 잃은 이들이 入島祖로 합류해온 지역이다.

최근 제주는 다시, 이주행렬을 통해 급격한 사회의 변화를 겪고 있다. 제주가 자연환경을 향유하며 느리게 사는 삶을 즐길 수 있는 지역으로 인식되면서 청년세대에게 좀처럼 설자리를 내주지 않는 사회에서 삐걱거림과 소외감을 느끼던 사람들이 청년계층을 중심으로 제주에 입도조로 정착하고 있다. 이들은 양복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삶을 꿈꾸며 제주의 곳곳으로 스며들어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이용해 제주의 색감을 바꾸어가고 있다. 

역사적, 지리적으로 주변부이던 곳, 제주를 디디고 선 주변인으로서의 청년세대. 이들과 이들의 자손에게 이 곳은 에덴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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