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도조 入島祖/서인해_2018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효정01_2016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효정02_2018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종달리당_2018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하라,마르꼬_2018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이하나_2017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루니_2017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선인장_2023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윤민_2015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윤민_2018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중산간 여신_2014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김현주_2017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광령_2020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세훈_2017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수리,양쯔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민창_2023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입도조 入島祖/신당_Pigment print_150x110cm_박정근

사람없는 섬의 사람들: 귀도조가 쓰는 입도조 이야기_박정근     
이나연(전 제주도립미술관관장)
가운데 산 하나가 우뚝했던 섬엔 사람이 없었다. 화산이 폭발하며 가장 큰 산이 됐고, 부글부글 끓어오른 자국은 오름이 되고, 용암이 지나간 자리는 굴이 됐다. 바다에서 치솟은 이 섬엔 한참이나 사람이 없었다.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어느 때 쯤인가. 제주의 설화대로 삼성혈의 구멍에서 세 개의 성을 가진 이들이 튀어나온 이후였을까. 사람이 없었던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야기는 믿기 힘든 이야기부터 믿음직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가지를 가지고 설화 혹은 신화라는 이름을 달고 구전됐다. 설화 속 조상을 섬기고 한참의 시간을 보낸 이 섬엔 지금도 사람이 없었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오가는 이 섬에서 태어난 청춘들은 사람이 사는 곳으로 옮겨 가길 원했다. 매해 천여명이 넘는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육지의 대학으로 진학해 돌아오질 않는다. 젊은이들이 없는 이 섬에서 무슨 일을 도모하고자 할 때면 늘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오곤 했다. 가운데 산 하나가 우뚝했던 섬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이 없던 섬에 육지에서 건너와 정착해 시조가 된 사람들을 ‘입도조(入島祖)’라고 부른다. 다른 지역에서 섬에 들어온 동일 성씨의 선조. 삼성혈에서 나왔다는 토착 성씨인 고, 부, 양씨를 제외하면 모두 입도조를 가진 셈이다. 사람이 없던 섬에 입도조들이 왔다. 조선 개국에 반대한 유배자들이 대다수 제주에 모여 선조가 되었다. 제주 출신인 나의 선조도 어느 땐가 제주로 유배했거나 정치적 피신을 한 관리였을까. 큰 잘못을 저질러 사람 없는 섬으로 피신한 죄인이었을까. 어쩌면 감귤을 따라, 혹은 따뜻한 기후를 따라 어떻게 나의 입도조는 입도조가 되었을까?   
박정근 작가에게 입도조 이야기를 들은 건 벌써 작년(2017년)의 이야기고, 원고 청탁은 받은 건 올해(2018년) 초였다. 그러니까 제주에 유례없이 폭설이 쏟아져 모든 비행기가 결항된 1월의 어느 날, 섬에 사는 한계에 대해 체험한 그 날, 집 앞 카페에서 만난 작가가 또 다시 입도조 얘기를 했다.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적임자라는 이야기를 한 이유도 짐작은 했다. 나는 제주에서 내 조상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입도조 노릇을 하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입도조가 아니라, 제주에서 살만큼 살다가 출도를 했다가 돌아온 경우 였다. 육지에서 들어온 입도조를 모시는 이 섬의 후예들은 선조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이 섬에 자리를 잡은 부모들은 자식들이 이 섬에서 자리를 잡길 기대하지 않았다. 좋은 환경에서 사람답게 일하며 살려면 육지로 가야한다고 여기곤 했다. 성적만 받쳐준다면 육지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일이, 육지에 있는 직장에 취직하는 일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제주로 돌아오는 일은 부모님이나 친척이 먼저 말린다. 육지로 진출한 뒤에 제주로 돌아오는 일은 실패로 여기는 인식도 있다.

2010년을 전후로 제주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도시의 생활공식을 따르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겠다는 이들이 제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제주에서의 한갓진 바닷가나 중산간에 집을 마련해, 카페며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육지와 제주를 오가는 삶의 방식을 마련해 살아가는 이들이 눈에 드러나게 많아졌다. 제주에 이주해 산다는 것이 도시의 삶에서 실패한 이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성공적이고 진취적인 기획임을 입증해 주는 이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더불어 스스로 삶을 꾸려갈 수 있는 문화예술관련 종사자들이 제주로 들어왔다. 왜인지 제주가 그들을 불렀고, 소환된 이들은 이제 새로운 입도조가 되려 한다.   

신세대 입도조의 삶의 방식은 일과 삶의 균형이다. 이 균형을 찾기 위해 개인작업이나 취미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의 삶의 방식에 맞는 사업을 선택한다. 하나는 게스트하우스. 숙박업소와 집이 분리되거나 혹은 결합된 소규모의 숙박 공간을 운영한다. 손님이 퇴실한 방을 청소하고 손님의 체크인 시간을 확인해 열쇠를 전달하거나 입실과정을 알려주는 절차를 마치면 나머지는 개인시간이 된다. 개인시간에 웹툰을 그리기도 하고, 본업인 기획이나 작업 등의 문화예술 일을 하기도 하며, 농사를 짓기도 한다. 시간이 많았다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회사나 상사의 눈치를 보는 일 없이 할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 계정에 홍보를 하기도 한다. 서울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제주에 내려와 난데없이 숙박업소를 운영하며 힐링하며 살고 있는 개인의 일상을 공유해 많은 공감을 얻기도 하고, 그 공감의 수만큼 별다른 홍보비용없이 숙박업소를 알릴 수 있다. 그렇게 도시에서 공감의 하트 버튼을 누르던 이들이 다시 주말이나 휴가에 제주에 내려와 숙박업소에 묵는다. 주머니가 여전히 가벼운 도시의 청년들이 제주를 찾아 묵는 건 쉐어하우스와도 비슷한 게스트하우스다. 집주인과 지속적인 유대를 갖는 손님들은 매 주말 제주를 찾아 같은 숙소에 묵거나 한달살기를 하기도 한다. 또다른 입도조의 대표창업아이템 하나는 카페. 바닷가나 중산간 오름에 위치한 제주의 색이 담긴 낡은 주택을 리노베이션해 주인의 감각이 가미된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를 한다. 여행을 좋아한다면 여행테마로, 북유럽 감성을 좋아한다면 미니멀한 모노톤으로 꾸미긴 하지만 킨포크 스타일의 포틀랜드 시골지역 감성이 압도적으로 많긴 하다. 어쨌든 좋다. 바다풍경이 일을 다하기도 하고(월정에 위치했던 ‘바다가 될’이라는 카페는 월정해변이 보이는 직사각형의 구멍 덕에 인스타의 스타가 되어 유명세를 치렀다. 월정붐이 일어나 지금의 카페촌을 만들기 전, 한적한 월정바닷가의 유일한 카페였다), 아무리 호젓한 산간에 숨어있어도 관광객은 기필코 찾아온다. 역시 소셜네트워크로 공고히 다져두었던 주인장과의 유대때문일수도 있고, 제주스러움을 간직한 곳이라는 환상이 작용하기도 한다. 이들이 비슷하게 내세우는 카페 운영의 변은 “나도 원래는 도시사람인데 이제는 제주에 내려와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자유롭게, 가끔 손님을 맞아 생계를 유지하며 지내고 있어요”다. 날씨가 아주 좋아서 혹은 너무 나빠서 가게를 쉰다거나, 귤을 따거나 고사리를 꺽으러 가야해서 가게를 휴업한다는 공지를 내걸기도 한다. 아무런 공지없이 가게문을 닫아 손님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어쨌든 이들은 일을 하는데 있어서 의무감이 덜하다. 내 삶과 개인시간이 중하고 일은 삶을 더욱 알차게 만들기 위한 부속품이라는 개념이 강하다. 서점과 공방 등 전문성이 좀 더 필요한 소규모 사업들을 꾸리기도 한다.         

청년세대가 공유하는 조금 한량스런 워라벨 문화를 설명하기 위한 생생한 예를 제시하기 위해 내 얘기를 하려고 한다. 한 작가의 작품집에 들어가는 글에 개인적인 삶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아도 되는 건가 싶어지는데, 어쩐지 작가가 원한 게 이것이었다고 멋대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내가 선택한 건 아니지만 제주에서 태어났다. 서귀포에서도 한갓진 시골이었고, 학업을 위해서 제주에서는 상대적으로 도시인 제주시로 초등학교 때 이사를 갔더랬다. 고등학교까지 제주에서 학업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왜 서울에 가야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스스로 내리고 움직인 건 아니었다. 대학을 갔더니 모든 조건이 서울출신이랑은 다르다는 걸 알았다. 가족 친구들과 떨어져서 자취를 해야했다. 생활에 대한 부담과 집에 대한 부담이 동시에 다가왔다. 제주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경제적 정서적 불편함을 떠안아야 했던 거다. 대학을 마쳤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아니었다. 고향엔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문화산업을 하는 기업도 기관도 부족한 제주에서 경제인구가 되어 살아가려면 자영업을 해야하는데 갓 대학을 졸업한 이에게 자영업을 시작할 노하우나 자본이 있을리 없었다. 서울에 남아 취직을 했다. 적은 연봉에 집세와 생활비를 감당하고 나면 저축을 할 수 없었다. 일은 고단했고 삶은 퍽퍽했으며 저축 없는 생활 구조 안에서는 어떤 미래도 그려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뉴욕으로 갔다. 서울이나 뉴욕이나 똑같이 사는 데 답이 없다면, 외국에 산다면 경력에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고향이 아니라면 서울이나 뉴욕이나 타지인 건 똑같았다. 똑같이 가난하고 똑같이 힘든 일이었다. 어떤 창업을 시작할만한 자본을 모으진 못했지만, 내 분야에서 일하는 방식에 대해 어느정도 감을 잡을 무렵, 제주로 취직하면서 귀도했다. 나는 말하자면 입도조가 아니라 귀도조인 셈이다. 2015년의 일이고, 제주를 떠난지 정확히 14년만의 회귀였다. 불안은 습관이 되어 체감하기도 어려워졌다. 불안한 상태인지 아닌지에 대한 감도 잡히지 않았다. 불확실한 시대에 불안하게만 살아온 조금이라도 덜 불안해질 곳은, 이 곳, 사람없는 섬 뿐이었다. 이 선택은 불안함이 만들어 낸 어떤 포기의 정서이자 시골로의 회귀로 볼 수도 있고, 어차피 평생 안정이란 없을 인생, 즐겁게라도 보내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입도조와 귀도조의 삶의 방식은 전통적인 예술가들의 라이프스타일과 겹친다. 외국에선 반 고흐와 고갱, 한국에서는 이중섭으로 상징되는 예술가상은 대체로 그렇다. 밥벌이를 고민하거나 가정을 간수하기보다는 예술에 삶을 바치며 때로는 주변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도 한다. 삶의 목적이 돈벌이에 있지 않고, 돈이 되지 않는 개인적 관심사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청년세대의 문제는 사실 예술가들의 문제로 대입해 고민해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의 전통적인 고민은 바로, 삶의 불안함이다.   

박정근은 2010년을 전후에 제주로 들어온 제 3세대 입도조를 불안계급으로 이해한다. 박정근 작가 자신 역시 불안한 환경을 가진 제주에서 작업을 이어가며, 이 작업들을 관통하는 코드를 자연스럽게 찾아냈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 불안계급을 유인한 자연과 문화를 제주가 가지고 있었다.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입도한 이들은 불안계급에 속한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찍어나간 작가 박정근의 자화상을 다시 그들 3세대 입도조를 통해 찍어가고 있었다. 벌써 10여년 전부터 박정근이 제주에서 찍어나간 해녀에서부터 입도조, 4.3의 유가족 등, 일련의 작업들은 관찰자로서든 증언자로서든 모두 제주라는 환경에 속한 작가의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이고, 그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묘사하는 입도조 시리즈는 그 점에서 가장 유의미한 작업이라 말할 수 있다.

불안한 사진 속 3세대 입도조는 발을 땅에 딛고 있지만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지만 동시에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신대륙으로 이주했던 청교도인처럼, 떠돌아야만 삶이 살아지는 집시처럼, 새로운 터를 찾아, 스스로 설계하는 삶을 찾아, 제주라는 곳에 입도한 이들은 아직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진 못했다. 개척자의 운명이고 입도조의 삶의 방식이다. 때로는 이 곳에 왜 위치하는지도 모른 채 이 환경에 놓여졌지만, 실상 모두 자신의 선택이다. 사람이 태어나기를 선택할 수 없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처럼, 입도조의 운명도 그러한 모양이다. 질 좋은 삶, 즐거움, 자연 등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 사는 곳을 바꿔봤지만, 살다 보면 왜 왔는지 모르는 지경에 처하는 데다가, 이주의 이유를 증명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길에서 다시 길을 잃기도 한다. 불안한 상태의 지속이다. 사진 속 초상들은 모두 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숲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꾼 한 입도조 가족의 사진이 있다. 4-6살 사이의 두 딸과 30대 중후반의 젊은 부부가 숲에 서 있다. 숲 너머의 배경에는 우주선처럼 보이는 석유공장이 있다. 자연에서의 삶을 기대했는데, 근처엔 공장지대가 있고, 사진 속의 공장은 우주선같다. 이주민들이 제주에서 기대한 삶과 실제 살아가야 하는 삶과의 괴리를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준다. 아직은 숲 속에 있는 입도조 부모의 품을 떠나 두 딸은 저 너며 석유공장 쪽으로 넘어가 살게 될까. 아니면 정말 숲 속에서 부모가 꿈꾸던 이상을 실현하며 살아가게 될까.       
  
실상 박정근이 묘사하는 건 바로 지금 제주의 상황이고 환경이다. 따라서 입도조 시리즈에서는 사람뿐 아니라 풍경을 포함하는 게 자연스럽다. 기운이 좋아서 해녀들이 기도를 드리는 종달리의 한 신당(해녀당)에 화려한 조화가 들어섰고, 공들인 술과 음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신에게 공을 들이라고 만들어놓은 데크에는 “공들인 음식 갖고 가세요”라고 삐뚤어진 글씨로 씌어있다. 동네 사람들은 이주민들이 신당에 조화를 들여 놓았다고 말을 전한다. 토착문화에 유입된 이질적인 요소들이 갈등 혹은 이질감을 야기하는 풍경을 만든다. 지역의 문화와 이주민이 더해 놓은 행위가 탄생시킨 기묘한 풍경이 지금의 제주를 보여주는 문화가 된다. 문화도 바뀌었고 신에 대한 태도도 변했다. 이 풍경이 사람으로 옮겨지면 사람이 들어간 이질적 풍경이 된다.

의도적으로 발을 숨기거나 자르거나 어두움에 가려지도록 연출된 사진 속 입도조들의 초상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인지 땅에 내려앉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어중간한 위치에 놓인다. 제주도의 특징적인 자연이나 인물이 속한 집이나 좋아하는 문화가 있는 공간에서 찍힌 초상은 제주로의 이주를 통해 자연과 문화를 바탕으로 본인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가시화하는 화면이다. 정치적인 유배를 한 1세대 입도조와 경제적인 이유로 제주로 온 2세대 입도조와는 다른 이유로 제주에 온 3세대 입도조들의 초상은 불확실한 이주의 이유만큼이나 불안정하다. 불안정함을 각오하고 찾아온 이 곳, 누군가는 아래로 내려와 점차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될테고, 누군가는 훌쩍 날아 다른 곳으로 떠나리라. 정착하지도 떠나지도 않은 이 상태의 불안감은 어쩌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동력이 될지도 모른다. 부족한 문화적 인프라와 거칠기만한 자연의 품에서 어떤 동력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박정근이 포착한 입도조 시리즈의 초상들은 입도조이기도 하지만, 제주의 새 문화를 만드는 조상노릇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미 박정근 작가가 스스로 그러하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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