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연(성결대학교 교수)
들어가며
제주로 이주 후 정착하여 자손이 제주인이 되도록 하는 첫 조상, 제주에서는 이들을 입도조(入島祖)라 부른다. 2018년과 2019년에 들어 다소 주춤하지만, 최근까지 제주에는 탁 트인 자연에서 자유로운 삶을 꾸려가기 위해 살림가지를 챙겨 제주로 넘어와 새로운 입도조가 되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2010년에는 531,905명을 기록하던 인구는 2015년 641,757명으로 5년 간 20.7% 증가했으며 2018년에는 667,191명에 이른다. 수도권을 제외한 모든 도 단위에서 인구가 감소하여 ‘지방소멸’의 위기까지 거론되는 최근의 경향을 감안할 때 이러한 제주도의 인구유입은 이례적인 현상이다.
이 글은 인문지리학의 한 분야인 정치생태학의 관점에서 제주 자연과 입도조가 동반 진화하는 과정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정치생태학은 인문지리학의 한 분야로, 주로 자연자원에 대한 여러 형태의 이용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경합을 탐구한다. 이 글은 그 중에서도 자연이 원시상태의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특수한 방식으로 구성하여 인식되도록 한 결과물이라는 ‘자연의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 of nature)의 관점을 취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제주의 자연이 역사적으로 구성되어 인식되는 방식과 제주로 정착하게 되는 입도조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글쓴이는 2013년을 중심으로 제주에 총 18개월을 거주하면서 제주 자연의 진화 및 이를 둘러싼 경합에 대한 연구를 위해 수집한 자료의 일부분을 바탕으로 이 글을 작성했다.
제주 자연의 활용과 입도조의 변천
제주의 자연환경은 우리나라 다른 부분(‘육지’)의 환경과 상이하다. 이를 기반으로 제주의 자연환경은 역사적으로 시대의 소용에 따라 서로 다르게 활용되었고 그 영향으로 제주에는 인구가 유입되었다. 제주의 자연환경에 대한 활용 목적 변화, 그리고 이와 연관된 입도조의 유입을 기준으로 제주 자연환경과 입도조 정착의 역사는 1) 고립기: 근대 이전 입도조 1세대, 2) 이국적 자연 구성기: 경제성장 시기 입도조 2세대 3) 제주 자연 재발견기: 제주올레길 이후 입도조 3세대 등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고립기: 근대이전 입도조 1세대
탐라국은 937년 고려 태조에 이르러 고려의 속국이 된 후 1105년부터는 고려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면서 우리나라의 일부분으로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집권적 통치체계가 강화되어 조선의 통치권에 완전히 편입되게 된다. 육지에 대한 제주의 상대적 자연환경, 즉 지리적 위치성으로 인해 제주에 대한 조선시대의 관점은 변방의 고립성으로 정의할 수 있었다. 지역특산품인 과실(귤, 유자 등), 우마, 해산물의 진상과 부역의 의무가 지나치게 무거워져 조선 중기 제주를 이탈하는 제주유민이 대규모로 발생하자 인조 7년(1629년)부터 순조 25년(1825)에 이르는 약 200년 간 제주에서 타지역으로의 이주를 국법으로 금지시키면서 조선시대 제주의 고립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변방의 고립성으로 인해 제주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배지로 활용되었다. 조선왕조 기간에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유배인은 약 2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배자의 사회계층은 승려, 관리, 왕족, 정치인, 학자 등으로 다양했으며, 제주민들은 이들에게 학문과 사상을 전수받기도 했다. 이러한 제주 유배인들은 정세변화에 따라 방면되거나 유배지를 옮겨 제주를 떠나기도 하였지만 사면 후 제주에 정착해 입도조가 되기도 했다고 알려지므로 이 글에서는 이들을 제주 입도조 1세대로 본다. 요약하자면, 제주 입도조 1세대는 정치적인 이유로 비자발적으로 제주에 입도하였으며, 고립된 절해고도의 변방이라는 지리적 자연환경이 이들이 입도조가 되는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 할 수 있다.
2) 이국적 자연 구성기: 경제성장 시기 입도조 2세대
1960년대를 시작으로 급속한 경제발전이 이루어질 무렵, 육지의 관점에서 제주의 자연환경은 “이국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예를 들어 매일경제신문은 1969년 8월 23일자 신문을 통해, ‘한라산이 마치 <스위스>의 한 산경처럼 삼복더위에도 백설을 머리에 이고 섬 전체를 굽어보고 있으며 곳곳에 펼쳐져있는 넓은 방목지는 한국 아닌 미서부 지역의 목장을 연상케해주고 있다...특히 4철 내내 꽃이 지지 않는 아열대기후와 알아듣기 힘든 제주도 특유의 토착방언은 이 섬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이국땅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키게 한다’고 싣고 있다. 즉 제주의 풍광과 인문환경은 스위스, 미서부 지역에 비견되며 ‘동양의 하와이’라는 익숙한 별칭도 얻을 정도로 이국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중앙정부는 ‘이국적’인 제주의 자연과 인문환경을 활용하여 제주에 관광산업을 발전시켜 국가의 산업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 과정은 사회간접시설 확충에 중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외지에서 제주로의, 그리고 제주 내 관광단지에 대한 접근성을 개선하기 위해 제주공항을 제주국제공항으로 승격시키고, 부산, 목포, 여수, 완도에 대형여객선을 취항시켰으며 도로를 건설 및 확장하는 등 교통기반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또한 통신, 용수 등을 위한 기반시설을 재정비하고, 중문을 국제위락단지로 개발하는 한 편 감귤, 축산을 비롯한 지역산업도 관광사업과 연계하여 추진하게 된다.
관광산업 개발이 사회간접자본 확충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초래된 영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글의 주제인 제주의 자연환경과 인구변화에 미친 두 가지 영향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환경보전 대 개발’이라는 제주 지역개발의 오랜 논쟁주제의 시발점이 형성되었다.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하고 확충하는 과정에서 제주의 자연과 인문환경의 물리적 근거인 주거지가 지속적으로 사라지거나 변형되었다. 예를 들어 경제발전 시기, 입도 후 관광시설과 관광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제2횡단도로가 한라산 서쪽 해발 1,100m 고지를 관통해 개통되면서 한라산의 원형은 변화되었다(그림 1 왼쪽). 또한 중문관광단지가 건설되면서 마을공동체가 이루어져있던 주거지는 사라졌다(그림 1 오른쪽). 1990년 들어 제주의 자연과 인문환경이 변화 및 소실되어가는 것에 대한 제주 도민의 반발이 거세게 나타났다. 지역개발 성과에 대해 불만족스러운 원인으로 제주 도민들은 지역주민 의사 미반영, 개발이익 분배와 함께 ‘향락적 환경조성 및 자연환경훼손’을 꼽았다(제주도 종합개발계획 1994:23). 즉, 제주섬 고유의 정체성이 크게 상실된 ‘콘크리트적 관광개발’이 경제발전 시기 제주에 관광산업을 발전시키면서 시작되었다고 본 것이다.
둘째, 제주에서 실시된 대규모 지역개발사업은 인구 유입을 촉발하여 입도조 2세대가 제주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를 전후하여 제주는 중앙정부가 관광산업 개발을 추진하면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으나, 1965년 기준 제주 인구는 32만에 불과해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 때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심각한 가뭄이 발생하자 특히 호남인들을 중심으로 제주로 대규모 이주하여 주로 제주항 주변에 정착하여 항만을 비롯한 사회간접시설 개발, 서귀포에서 생산된 감귤의 타지 이송 등을 위한 노동력을 공급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별적 이주 외에도 중앙정부에서는 제주 중산간 지역에 주거지와 농지를 마련하여 도시의 실업인구를 중심으로 17만 가구를 제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검토하기도 했다. 1980년대까지 이어진 인구유입으로, 제주인구에서 제주 외 지역 출생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1960년 4.6% → 1970년 6.3% → 1980년 11.2% → 1985년 13.1% → 1990년 15.1%로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이와 같이, 1960년대 이후 제주의 ‘이국적’ 자연을 기반으로 한 관광 및 산업개발로 촉발된 노동수요 증가에 부응하여 이주민이 입도하여 입도조 2세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경제발전시기 제주의 자연환경 변화로 발생한 경제적 유인 요인이 이들 입도조의 정착에 영향을 미쳤다 볼 수 있다.
3) 제주 고유의 자연 재발견기: 제주올레길 이후 입도조 3세대
관광산업 설치 이후 한동안 제주는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지로 여겨지며 신혼여행, 효도여행, 수학여행 등의 목적지로 명성을 누렸다. 제주 관광객수는 1966년 10만, 1977년 50만, 1983년 100만, 1991년 300만, 1996년 400만을 상회하며 증가하다가 해외여행 자유화, 외환위기, 바가지요금, 견학 위주의 일률적 관광형태 등으로 인해 제주관광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되면서 침체기를 맞아 500만에 이르는데 10년이 소요되었다(2005년)(제주특별자치도 2006년 제주 관광동향에 관한 연차보고서). 당시 도민들 가운데서도 제주 관광은 끝났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침체기를 이어가던 제주 관광산업은 제주올레길이 개장하면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제주올레길은 민간단체인 (사)제주올레가 주축이 되어 2007년 시흥리를 출발점으로 하는 1코스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사)제주올레는 제주의 자연에 대한 영향을 최소화하면서도 관광객들이 제주 고유의 자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제주올레길 설치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이 가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에서 제주의 자연과 인문환경은 특수한 방식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사)제주올레가 제주올레길을 통해 제주의 자연에 대한 인식을 재구성함에 있어 핵심을 관통하는 아이디어는 제주 관광산업의 개발 방식과 이것이 관광행태에 초래한 결과에 대한 반발이었다. 먼저, 토목식 관광 인프라 개발에 대한 반발이었다. 제주에 관광산업이 이식되는 과정, 그리고 이후 제주의 관광을 개발하는 과정은 제주의 자연과 생태를 밀어버리거나 덮어버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제주의 자연과 생태는 손실되고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에 대한 ‘혁명’적 반기는 (사)제주올레의 ‘안티 공구리(콘크리트 반대)’ 슬로건에 반영되었다. 이에 따라 (사)제주올레는 [친환경 올레길 가이드라인](2010)을 도입하여 리본이나 페인트로 제주올레길의 방향을 표시하여 생태 및 경관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했다. 다음으로, 토목식으로 관광산업을 개발하여 인간을 자연, 그리고 어릴 적 추억과 멀어지게 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콘크리트로 덮인 길을 운전하여 정형화된 관광지만 돌아본 후 관광단지에 위치한 호텔로 돌아가 여정을 풀게끔 관광 인프라를 만든 덕에 관광객은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제주 고유의 자연을 감상할 기회, 그리고 제주 할망들과 말 한 마디 나눌 기회도 갖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제주올레는 콘크리트를 운전하는 여행 행태를 지양하고 거기서 벗어나 제주 주민들에게 마저 대부분 잊혀진 포장되지 않는 길을 따라 낸 제주올레길을 걷도록 권한다. 이를 통해 관광객들은 ‘제주의 속살’을 발견하여 제주 현지인만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제주의 자연을 감상하고, [할망민박]에서 할망들이 차려주는 소박하지만 넉넉한 제주 현지의 밥상으로 끼니를 든든히 채우고 푸근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속도’에 대한 반발이었다. 기존 제주관광의 행태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휴가를 얻어 제주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숨돌릴 틈 없이 관광지 사이를 오가며 유명한 관광지 목록을 최대한 많이 ‘찍은’ 후 바로 비행기를 타고 떠나버리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사)제주올레는 그러지 말고 ‘간세다리’가 되라고 조언했다. 적어도 제주올레길을 걸으면서는 의도적으로 게으름뱅이가 되어 자연과, 제주 사람들과 소통하라 했다. 이들이 바쁜 일상으로 지친 관광객의 심신을 토닥여 위로해줄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주올레길의 담론은 제주의 관광산업을 겨냥하지만, 한 차원 확대해보면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개발방식과도 직접적으로 맞아 떨어진다. 우리나라는 단기간 안에 급격한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산업화, 경제성장에 치중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환경적 삶의 질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졌다. 또한 개인들은 속도전을 앞세운 산업화의 병기로 다루어졌다. 이들은 생산량, 노동인구, 무역수지, GNP 1만불, 2만불 등의 숫자만을 구성했으며, 서로 다른 개인적 특성으로 인해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탈이 나도 경제성장의 방해물이 되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었다. 경제발전을 이룬 결과 벌판, 풀, 나무를 치우고 들어선 번쩍이는 도시 속에서 부품이 되어 산업화를 거치며 몸에 새겨진 속도전에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있는 동안 내 안의 목소리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콘크리트와 속도전이 자연과 사람을 덮어버리기 전 마음이 답답할 때면 숨어들었던 ‘오소록한’ 산등성이와 땀내나는 푸근한 엄마품을 이어 만든 제주올레길은 이들에게 수고가 많다며 품을 내주고 토닥인다. 이렇게 올레길을 통해 (사)제주올레는 잠재적인 제주 관광객인 우리나라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느껴온 문제에 호소함으로써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사)제주올레 이사장의 개인적 경험이 제주올레길의 치유능력에 대한 설득력을 높였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주올레길을 따라 존재하는 제주의 자연과 사람은 치유의 기능을 입게 되었다. 전국에는 ‘걷는 길’ 열풍이 불었고, 제주를 방문하는 관광객의 숫자는 급속히 증가했다. 이런 양적 지표의 변화 외에도 제주올레길 담론의 영향은 제주올레길을 방문하는 관광객의 행태 및 제주 자연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도 나타났다. 등산복을 착용하고 배낭을 둘러맨 채 제주 해변이나 농촌마을을 걷는 관광객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관광객들은 자신의 속도로 천천히 걸으면서 바다와 풀을 들여다보고 냄새를 맡았으며, 제주 마을주민이나 다른 관광객들과 곧잘 어울렸고, 올레길 위에 떨어진 쓰레기를 자발적으로 주워들었다. 이렇게 이들은 제주올레길이 입혀진 제주의 자연과 주민들을 특수한 방식으로 소비했다.
치유, 쉼, 자유, 노스텔지어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제주의 자연은 제주 입도조 3세대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주올레길의 열풍이 지속되면서 새롭게 재발견된 제주 자연의 범위는 제주올레길에서 제주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제주의 자연이 숨가쁜 삶에서의 호흡 고르기를 제공한다는 개념으로 인식되고, 특히 그런 자연에서의 삶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실행하는 이주로 연결되도록 한 데에는 제주올레길 외에도 제주 애월읍으로 이주하여 제주 이주열풍을 불러일으켰다는 한 인기가수의 영향도 상당했다. 제주올레길 개장(2007년)과 해당 가수의 이주(2010년) 이후 제주인구의 순이동은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 중 특히 30대 인구의 유입이 두드러진다. 제주 전체의 30대 중 정착기간이 10년 미만인 이주민은 15.9%에 달해 모든 연령대 중 가장 높은 비율을 나타내며, 그 뒤를 40대(9.8%), 50대(6.5%), 20대(6.2%), 60대 이상(4.9%)이 잇고 있다. 즉, 30대, 40대의 젊은 인구층이 2010년 무렵을 기점으로 제주로 활발히 유입되어 이 책에서 다루는 제주 입도조 3세대를 이루게 된다.
제주 입도조 3세대는 다음의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이들이 이주 목적지로 제주를 택한 가장 큰 원인은 제주의 자연이며, 그 안에서의 자유로운 삶이다. 다른 지역에도 자연은 있는데 자연 속에서의 삶을 영위할 장소로 제주를 택한 것에는 제주 자연환경 자체가 독특한 것에도 원인이 있지만 제주의 자연이 제주올레길을 통해 구성되어 재발견된 것이 영향을 미쳤다 볼 수 있다. 둘째, 예술가 이외에 이주 이전의 직종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경우는 별로 없으며, 자연환경으로의 접근성과 경관이 좋은 지역에 정착하여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숙박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 입도조 3세대 간의 교류활동(파티, 장터, 워크숍 등)이 많아 원할 경우 정보교류, 학습, 친목도모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모임이 입회에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문화적 차이로 인해 제주 선주민들이 참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지막으로 출신지로 다시 돌아갈 계획을 지닌 입도조 3세대는 매우 드물며, 제주의 자연 속에서 여유를 누리며 자녀를 양육하는 것에 대해 만족한다. 요약하자면, 제주 입도조 3세대는 출신지에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추구하는 것에 지치거나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던 많은 젊은 세대가 경력과 기반의 성장을 희생하고 그 대신 자연 속에서 비슷한 관심사를 지닌 이웃과 교류하며 자녀를 양육하는 형태 위주의 삶을 추구하기 위해 이주라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 결과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정치적 이유로 제주로 입도했던 입도조 1세대, 경제적 이유로 입도했던 입도조 2세대와 달리, 입도조 3세대의 입도 원인은 환경‧문화적이라 하는 것이 적당할 것으로 보인다.
나오며
역사적으로 제주의 자연은 육지와의 차별성이 시대의 소용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으로 프레임되어 왔으며, 그 과정과 결과를 통해 입도조가 형성되어 왔다. 근대가 시작되기 이전 제주의 자연은 변방의 고립된 섬이라 인식되어 유배지로 활용되었으며, 유배기간 이후 육지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입도조 1세대가 되었다. 1960년대를 기점으로 경제성장을 이루기 시작하던 시기 제주의 자연은 이국적인 자연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를 관광자원화하면서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입도조 2세대가 입도하였다. 2010년 정도를 기점으로 제주올레길을 통해 구성된 제주 자연은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향해 질주하면서 경제를 우선시하는 동안 억눌러왔던 사회적, 환경적, 개인적 욕망들을 돌아보는 치유의 기능을 제공했다. 30-40대를 중심으로 한 제주 입도조 3세대는 그러한 자연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제주로 입도했다.
둘러보면 천년을 똑같은 바다며 산일진대, 우리가 인식하는 제주의 자연은 필요에 따라 이모양 저모양으로 변형되어 왔다. 하물며 동일한 프레임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인식 또한 셀 수 없는 변종으로 나누어진다. 다음 번 제주의 자연에는 어떤 프레임이 덧씌워질지 사뭇 궁금해진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저 풀과 나무의 진짜 본성을 우리는 아마도 영원히 모르고 말 것이라는 무력감이 들긴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는 프레임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며, 어떤 실질적(즉, 정치경제적) 영향을 초래하는지에 대한 관심을 유지한다면, 인식이 걷겨나간 풀과 나무와 조금 더 가까이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